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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골목’은 아이들의 놀이터였습니다. 어른들은 골목을 지나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곳은 이웃들의 삶이 녹아 흐르는 작은 물길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골목이 사라졌습니다. 그나마 남은 골목은 이제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한 차량들로 빼곡합니다.

사진가 김기찬씨(1938~2005)는 골목안 풍경을 ‘평생의 테마’로 삼았습니다. 그의 사진에는 고도의 경제성장과 도심 재개발로 상실되고 해체된 고향과 가족, 그리고 서민들의 삶과 이웃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친밀함을 바탕으로 골목이라는 협소한 공간에서 이뤄진 오랜 시간의 기록입니다. ‘골목을 사랑한 사진가’(눈빛)의 작품 속 골목을 걸어봅니다. 본문은 책 속에 담긴 김기찬씨의 글을 발췌·정리한 것입니다.



■ 마음의 고향,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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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림동, 1973. 2. | 눈빛 제공


처음 사진을 시작할 무렵 서울역과 염천교에서 만난 행상들의 생활 터전을 뒤쫓아 들어온 중림동 골목. 좁지만 구석구석 배어 있는 훈훈한 인정과 사람 사는 얘기가 있고, 나의 소년 시절의 짙은 향수로 남은 곳입니다. 마음의 고향입니다. 그래서 중림동 골목은 언제나 내 어머니의 품같이 포근합니다.



■ 다시 만난 유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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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림동, 1972. 9. | 눈빛 제공

1972년 9월 동생을 업고 집으로 올라가는 유영애를 만났습니다. 유영애의 등에 업힌 동생은, 인형을 업고 있습니다. 몇번이나 층계를 올라가라, 내려가라 하고 부산을 떨면서 사진을 찍었지만 짜증 한 번 부리지 않고 촬영에 응해줬습니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항상 동생을 잘 챙기고, 동네 아이들과 말다툼 한번 안하고 늘 웃음이 가득한 착한 소녀 유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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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림동, 2001. 12. | 눈빛 제공

1990년대 들어 옛 사람들을 다시 찾아 촬영하는 작업을 시작하면서 가장 보고 싶고, 찍고 싶었던 소녀가 유영애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수소문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TV 방송 프로그램을 출연을 계기로 유영애를 만났습니다. 마치 이산가족을 만나는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29년 만에 만난 ‘유영애씨’는 눈물까지 글썽거렸습니다. 피 한방을 섞이지 않았지만 참으로 가슴이 벅찼습니다. 이제, 유영애 등에서 인형을 업고 있던 동생 영자씨가 아들을 업고 있습니다.



■ 쌍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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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림동, 1972. 7. | 눈빛 제공

1972년 무더운 여름날, 중림동 골목을 내려오다 쌍둥이를 만났습니다. 몇년이 흘러 다시 그 집 앞으로 지나가다 ‘뽀글뽀글’ 파마 머리를 한 쌍둥이를 봤습니다. 쌍둥이들은 “3학년”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후론 쌍둥이를 볼 수 없었습니다. 이사를 갔다고 했습니다. 그게 1980년 중반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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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림동, 2001. 8 .| 눈빛 제공

29년 뒤 쌍둥이 자매와 어머니를 다시 만나 사진에 담았습니다. 그것도 전에 살던 중림동 골목이 재개발돼 입주한 새 아파트 앞에서 말입니다.



■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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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림동, 1981. 12. | 눈빛 제공

골목의 겨울은 유난히도 춥고 쓸쓸합니다. 방 안은 찬바람이 돕니다. 몸시 추운 날은 방 안에 있어도 코가 시렵고 걸레마저 얼어서 동태가 돼 버리니, 더더군다나 특별한 일이 없으면 바깥 출입은 아예 하질 않습니다. 그래서 겨울의 골목은 쓸쓸하고 을씨년스럽기까지 합니다. 솜같이 포근한 눈 위로 부지런한 우체부 한 사람이 조심스레 골목길을 내려옵니다.



■ 강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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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림동, 1994. 4. | 눈빛 제공

골목에는 아이들 못지않게 강아지도 많습니다. 생활이 넉넉해 애완용으로 기르는 것이 아니라 골목안이 좁아터져 아이들의 놀이공간이 없으니, 강아지라도 데리고 놀고 싶어 하는 아이들 성화에 못 이겨 사준 것 같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순이는 애견 ‘쫑’을 데리고 골목으로 나왔는데, 훈이네 ‘복실이’ 하고 승역이네 ‘삐삐’가 학교 갔다 온 주인을 만나 산책을 나왔습니다.



■ 노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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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림동, 1993. 8 | 눈빛 제공

숨을 헐떡거리며 은행나무 계단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운동 삼아 동네 산책을 하겠다고 집을 나섰는데 계단이 가팔라 가던 길을 멈추고 계단에 앉아 쉬는 중이었습니다. 할머니는 행보가 불편한 할아버지가 걱정돼 뒤쫓아 나와 집으로 돌아가자고 달래고 있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할아버지는 건강한 체구로 지팡이 없이 아침마다 동네를 산책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어쩌다 나를 만나면 내 목에 걸려 있는 카메라의 이름을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몇 번씩 되뇌이면서 내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좋은 작품 많이 찍어요” 하시고는 늠름한 모습으로 걸어가시곤 했습니다. 세월의 흐름이 서글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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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림동, 1984. 5 | 눈빛 제공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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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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